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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드라마

[ 밤쉘 ] 미모에 가려진 천재 발명가, 둘을 동시에 가질순 없었다.

by 하얀태양 2018. 6. 4.

 헤디 라머를 파헤치다

 

밤쉘(bombshell)의 사전적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사용되는데, 첫 번째가 '폭탄선언'이고 두 번째는 '섹시한 금발 미녀'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화 ‘밤쉘’은 화려한 외모에 가려 주목받지 못했던 헤디 라머의 ‘발명가’로서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입니다. 

 

'밤쉘' 포스터

장르 : 다큐멘터리 | 미국 | 상영시간 : 89분 | 등급 : 15세 관람가

 

오스트리아 유대인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세상 모든 물건이 작동하는 원리를 궁금해했습니다. 다섯 살 때 오르골을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기도 했고, 학교에서는 화학교과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밤쉘' 스틸컷

 

헤디 라머는 1940년대 할리우드를 뒤흔든 시대의 아이콘이었습니다. 1933년 오스트리아에서 만든 데뷔작 <엑스타제>에서 좋은 연기로 인해 명성을 얻은 후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붐 타운>(1941) <삼손과 데릴라>(1949) 등 수많은 히트작을 남겼습니다.

 

5대 5 가르마의 검고 굵은 웨이브 머리를 할리우드에 유행시켰으며, '백설공주' 캐릭터의 모델이었고, '캣우먼'의 탄생에 영감을 주었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밤쉘' 스틸컷

 

당시 영화사는 배우들을 노예처럼 부렸습니다. 각성제를 먹여가며 새벽부터 밤까지 촬영했습니다. 하지만 바쁜 스케줄에도 헤디 라머는 집에 돌아와 바로 잠들지 않았고, 그는 집에 완벽한 실험 테이블을 갖추고 늘 뭔가를 발명하려 했습니다. 아이디어가 생기면 노트에 적었고 과학자들과 교류했습니다.

 

 

영화 관계자와 관객들은 그의 화려한 외모에만 집중했지만, 정작 라머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발명'이었습니다. 라머는 초기 할리우드의 배우 착취 시스템에 시달리며 주 6일의 강도 높은 촬영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발명에 몰두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이민자인 라머는 2차 세계대전 발발로 민간인이 탄 여객선조차 독일 잠수함 공격을 받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무선조종이 가능한 어뢰 개발에 착수 합니다.

 

'밤쉘' 스틸컷

 

라머는 무선으로 어뢰를 조종하려면 보안기술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에 따라 모함과 어뢰가 주파수를 바꿔가며 통신을 주고받는 개념을 창안하고 '주파수 도약'(frequency hopping)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주파수 도약은 오늘날 무선통신 산업 근간을 이루는 기술입니다. 이 기술은 현재 GPS, 와이파이, 블루투스, 휴대전화 통화 등에 필수적으로 사용됩니다.

 

2015년 구글은 헤디 라머 탄생 101주년을 맞이해 헌정 영상을 발표했습니다. 이 영상은 배우로서보다도 과학자 헤디 라머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서 '헤디 라머가 없었다면 구글도 없었다'(NO HEDY LAMARR, NO GOOGLE)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헤디 라머는 1942년 '주파수 도약' 기술 특허를 취득하지만, 당시 적국이던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특허를 몰수 당합니다. 또 해군 역시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사용을 거부했습니다. 그 이면에는 '여배우의 발명 따위 믿을 수 없다'는 편견이 깔렸습니다.

 

라머는 여배우로 화려한 삶을 누렸지만, 자신이 진정 추구한 과학자의 삶은 부당한 편견이 덧씌워져 무시당하고 홀대당한 것입니다. '밤쉘'은 31일부터 8일간 서울 신촌 일대에서 열리는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아이콘: 그녀의 영향력' 섹션에 공식 초청됐습니다.

 

 

 평탄치 않은 사생활

 

<밤쉘>은 헤디 라머의 파란만장한 일생의 궤적을 보여줍니다. 헤디 라머는 191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누드 사진과 영화 <엑스타제>로 유명해졌습니다. 19세에 오스트리아 군수업계 거물과 결혼하였으나 의처증에 시달리다가 야밤에 도망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MGM 영화사의 설립자 루이 B.메이어와 손잡고 영화에 출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50년대 이후 그녀의 인기는 하락했습니다. 결혼과 이혼을 여섯 번씩 하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데 실패했습니다. 말년에는 가족들과 연락을 끊은 채 약물과 성형 중독에 시달렸습니다.

 

'밤쉘' 스틸컷

 

 그녀의 고백

 

“사람들은 잘 몰라요. 저는 외모보다는 두뇌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란 걸 말이에요.” 그는 아름다웠고 똑똑했습니다.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기술을 개발했으며, 악덕 영화제작사에 반기를 들고 직접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아름다운 여자에게 똑똑함은 필요없던 세상이었습니다. 헤디 라머의 능력은 폄하됐고, 그는 오직 섹시한 이미지로만 소비됐습니다. 그럼에도 헤디 라머는 2000년 사망할 때까지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놓지 않았습니다.

 

'밤쉘' 스틸컷

“사람들은 비이성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에요. 그럼에도 그들을 사랑하세요. 좋은 일을 하면 다른 동기가 있다고 비난할지 몰라요. 그럼에도 좋은 일을 하세요. 당신의 최고를 세상에 주고도 호되게 당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세상에 최고를 주세요.” 늘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헤디 라머. 보안 무선통신의 혁명을 이뤄낸 위대한 인물이지만 ‘밤쉘’로만 기억되질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