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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드라마

22분: 아덴만 구출작전 (22 Minutes, 2014)

by 하얀태양 2017. 8. 3.

소말리아 인근 아덴만 해상에서 러시아 대형 유조선이 해적에게 납치당한 사상 최악의 사건. 유조선을 장악한 해적들은 선원들을 인질로 잡아 몸값을 요구하고, 정찰을 나온 해군부대가 이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사태는 일촉즉발로 흘러간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세계는,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저기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일어난 내전이 더 이상 우리에게 무관한 일이 될 수가 없다. 그 내전 때문에 발생한 소말리아 해적이 우리의 안전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도 아덴 만에서 소말리아 해적에게 선박이 피납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덴 만 구출작전이라고 하면, 우리는 아덴 만 여명 작전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22분: 아덴만 구출작전 22 Minutes은, 여명 작전이 아니라, 바로 피납된 러시아의 대형 유조선을 구출하는 이야기이다. 소말리아 인근 아덴만 해상에서 러시아 대형 유조선이 해적에게 납치당하자, 러시아 해군이 이를 구출하기 위해 작전을 펼친 영화이다. 사실 이 영화 매우 실망스럽다. 이 영화를 관람한 관객의 수가 고작 202명에 불과하다. 액션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고, 재미있다고 말하기엔 좀 어설프고..

그러나 영화는 꼭 재미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 물론 이 말은 이 영화를 꼭 보라고 추천하는 의미는 아니다 - “아니 액션영화에서 재미를 찾지 않는다면, 어쩌라고?”라는 반문을 할 사람이 많을 듯 싶다. 22분: 아덴만 구출작전 22 Minutes은 인질구출 영화이다. 즉 인질의 생명을 얼마나 무사히 구하느냐가 바로 포인트인 것이다. 얼마나 멋지게 구했느냐가 아니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목숨을 매우 귀하게 생각하고, 마치 내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는 것처럼 상상하고, 인질들의 목숨이 무사히 구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름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도 있다.

여기에 이 영화는 우리에게 교훈도 준다.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외면하는, 이웃의 아픔은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아프리카 전쟁 난민이 굶어죽든, 아니든, 어떤 면에서는 우리와 상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먹을 게 없을 때 그냥 굶어죽는 사람은 없다. 자신들의 생존권이 짓밟힐 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물론 소말리아 해적을 생존권 투쟁의 투사라고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그 중에는 어쩔 수 없이 해적질을 하는,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구출 작전을 도와주었던 해적 처럼. 그는, 그냥 살고 싶었을 뿐, 사람 죽이는 해적질은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해적질밖에 없었을 테니까. 우리가 소말리아 난민을 개네들 문제라고 외면하는 동안, 그 외면으로 생긴 삶의 비참함 속에서 그들은 소말리아 해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바로 생존권이 짓밟힌 이웃이다. 그들에겐 더 이상 잃은 것이 없고, 그래서 무슨 짓을 해도, 설령 나쁜 짓을 해서 감옥에 가게 되더라도, 감옥이 그들이 현재 겪고 있는 현실보다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말리아 해적이 러시아 감옥에 들어가서 감옥을 나온 후 러시아 시민으로 살고 싶다고 했을 때, 그 해적이 겪고 있는 삶의 비참함이 느껴졌다. 그 해적은, 구출작전 중 죽었는데, 어쩌면, 그 죽음이 슬프지 않고 위로가 되었던 것은, 그가 살아야 될 현실에서 그가 또 받게 될 고통이 안쓰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존권, 특히 우리 이웃의 생존권은 중요하다. 그 이웃이 바로 우리 옆에 있든, 아니면 저 멀리 외국에 있든 상관없이 그 이웃의 선택이 우리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생존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어야 하느냐는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충분히 다른 길을 통해서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자기가 겪게 될 큰 손해 때문에, 생존권 투쟁이라는 명목으로, 사실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생존권 투쟁의 개별 사례가 모두 다양하므로, 함부로 여기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이웃의 생존권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내가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다운 삶이 아닐까?